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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기술개발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 군사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을 소련 체제 붕괴 후 民需로 돌려 상업화의 물꼬를 텄다. 이스라엘 전국은 거대한 연구단지. 하이테크 거품이 빠진 후엔 BT(생명공학)에 눈을 돌리고 있다

姜 英 守 KOTRA 텔아비브 무역관 차장
1961년 경남 사천 출생. 경상大 경제학과 졸업. 1986년 KOTRA 입사. 본사에서 中東업무 담당. 1990년 카사블랑카 무역관 근무 3년, 1996년 텔아비브 무역관 3년 근무 후, 2002년 초부터 다시 텔아비브에서 근무 중. 1990년부터 유태인 연구를 시작, 히브리語와 이디시語를 배웠고, 1999년에는 「유태인 오천년사」를 출간했다.

  위성 수신용 안테나 창업주

지난 1월28일 오후 텔아비브 대학교 경영대학원 대강의실이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기업 사장들과 임원, 과학자·엔지니어·경영학 교수·MBA 학생 그리고 기자들로 가득 찼다. 「MIT 기업가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필자의 왼쪽에 앉은 사람은 보안부문의 벤처기업을 경영하고 있는 사장이었는데, 2주일 전에 서울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 앞의 사람은 이스라엘 미사일 제조업체인 「라파엘」에서 마이크로 電子를 맡고 있는 책임자였고, 뒤늦게 들어온 오른쪽 좌석 주인은 이스라엘에서 벤처투자社를 운영하고 있는 프랑스人 젊은 친구다.

개회사가 끝나고 첫 번째 연사 요엘 갓이 단상에 올라섰다. 요엘 갓은 위성 수신용 안테나를 만드는 「길랏 새틀라이트」의 창업주. 그는 軍에서 같이 근무했던 친구 5명과 함께 1987년 회사를 창업했다. 세계적인 IT 붐을 타고 그의 회사는 급성장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미국 하이테크 업계에서도 관심을 끌었다. 나스닥에 상장된 이 회사의 株價는 최고 180달러까지 올라갔다.

1990년대 후반 이스라엘人들이 부러워하는 벤처기업 성공가로 부상했던 그는 양복 속에 와이셔츠가 아닌 가벼운 스웨터를 입었다. 정장을 기피하는 이스라엘人임을 복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45분에 걸쳐 창업 단계에서부터 그가 회장직을 내놓았던 2003년 봄까지 있었던 일과 그의 경영철학을 설명했다.

벤처기업의 성공률에 관한 실리콘 밸리의 통계에 의하면, 1000개 창업 벤처 중 1년을 버티는 기업이 100개이며, 이 100개社 가운데 3년 더 생존하는 기업은 10개社이고, 창업한 지 6년 이내 나스닥에 상장하는 기업은 1개社라고 한다. 1987년에 창업해 6년 만에 나스닥에 상장된 「길랏 새틀라이트」는 1000개 벤처기업 중에서 성공한 사례였다.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사는 미국은 최대 동맹국으로 전통적으로 대미의존정책을 추구해왔다. 이스라엘이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중동국가는 이집트·요르단·모로코지만 중동평화협상의 진전에 따라 대아랍권 외교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는 오슬로협정 이후 평화과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착촌건설 강행과 요르단강 서안 군대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양측간 폭탄테러와 보복시위가 번갈아 전개되면서 갈등을 빚었으나 1998년 10월 23일 역사적인 <영토·평화교환협정>에 조인했다. 1967년 3차중동전 때 단교한 러시아와는 1991년 10월 복교했다. 1992년 중국·인도, 1993년 베트남과 각각 수교했다. 바티칸과는 가톨릭-유대교 두 종교간의 오랜 반목으로 미수교상태로 있다가 1994년 6월 수교에 합의했다.

2003년 6월 G.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 총리, 팔레스타인 수반과의 3자회담에서 폭력종식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추진 등에 합의하고 중동평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해 9월에 이스라엘 내각은 잇따라 발생한 대이스라엘 폭탄테러에 대응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축출키로 결정함에 따라 로드맵은 좌초 위기에 직면하였다.

  돈이 어머니보다 더 중요한 시기

요엘 갓이 회사를 창업한 1987년에는 벤처자금이 全無하던 때여서 모든 것을 창업자들이 직접 해결해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10년 만에 세계 일류 벤처기업으로 성장시키기까지의 경영철학은 「한 제품·한 시장·한 채널」이었다고 요엘 갓은 말했다.

그는 벤처기업을 경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기술개발 후 제품화하는 단계라고 했다. 그의 경우, 창업 후 5년 만에 첫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을 본격적으로 판매하기까지는 5년이 더 소요되었다고 했다.

이 기간 중 CEO(최고경영자)의 능력은 필요한 돈을 얼마나 끌어 오느냐에 달려 있는데, 이 단계에서 대부분의 벤처기업들이 높은 장벽에 부딪혀 쓰러진다고 했다. 그는 『돈이 어머니보다도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때가 바로 그때』라며 웃었다. 제품 생산 후 판매 단계에서는 마케팅 인력이 중요하다. 그는 마케팅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돈을 주려 하지 않는다. 이왕이면 잘 아는 사람에게서 물건을 사려 한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그는 벤처기업 단계에서의 경영과 종업원이 수백 명으로 늘어난 상태에서의 경영은 다르다고 말하면서 이 대목을 「파괴의 씨앗들」이라고 표시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수십 명의 직원만 있는 창업 단계에서는 모든 일이 非공식적으로 척척 진행되었지만, 종업원이 수백 명으로 늘어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제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 조직문화 자체가 변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수십 명의 종업원을 가진 창업 단계의 벤처기업은 운영할 수 있지만, 1000명에 달하는 대기업을 운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해 2003년 3월 회장직을 내놓고 유능한 전문경영인에게 회장직을 맡기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2000년 중반부터 꺾인 하이테크 景氣의 여파로 赤字경영이 심각했던 여건도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한창 바쁠 때는 시간의 40~50%를 비행기 속에서 보냈고, 가장 많이 먹은 식사가 기내식이라면서 농담했다. 현재 개인 투자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한국에도 몇 차례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한국정부의 기술개발을 선도하는 강력한 정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면서 한국 기업과의 합작투자에 관심을 표시했다.




  생존을 위한 기술개발

1921년 「상대성 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은 일찍부터 이스라엘 재건을 위한 시오니즘에 동참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재건되기 전부터 예루살렘 소재 히브리 대학 발전에 애썼고, 1924년엔 북부 항구도시 하이파에 테크니온 工大 설립을 주도하여 초대 총장을 맡았다. 기술개발을 중시해 온 그는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문기술 개발만이 생존전쟁에서 이겨나갈 수 있다』

이스라엘人들은 아인슈타인의 이 말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불모지 사막 위에 생활터전을 만들어 기존 정착민 및 주변 敵들과 싸우면서 생존해 나간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당면 과제는 물이었다. 東歐에서 이주해 온 시오니스트들은 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雨期인 겨울에 내린 빗물이 고이는 低지대에 집단촌락을 세웠다. 이 촌락들에 학질이 번져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사망하자 유태인들은 1920년대 구릉지대 꼭대기로 촌락을 옮기고 북부 갈릴리 호수에 있는 물을 파이프로 끌어다 사용하기 시작했다.

귀한 물을 사람과 동물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식물도 물이 필요했다. 특히 농사를 지어야 사막에서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농업용수가 필요했다. 사막의 뙤약볕 아래에서 농작물에 물을 댄다는 것은 사치스럽게 보일 수 있으나, 농사를 짓지 않으면 자립 경제체제를 갖출 수 없는 여건이었다.

유태인들은 물을 최대한 아끼면서 효율적으로 농작물에 물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나무나 채소의 뿌리 부근에 고무호스를 설치하여 물이 다른 데로 새어 나가지 않고 그대로 뿌리에 흡수되도록 하는 관개시스템을 고안했다. 일정한 시간마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시스템이었다. 이 관개시스템은 세계적인 상품이 되어 한국에도 진출해 있다.

이스라엘을 주변 아랍국들과 비교할 때 도시에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고, 나무들이 많다는 점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러한 나무들이나 녹지대를 볼 때마다 필자는 돈덩어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물방울이 떨어지는 고무호스를 둘러감고 있기 때문이다.

  MIT 工大를 능가하는 테크니온 대학

이스라엘人들은 자연환경과의 싸움 외에 주변 아랍人들과도 전쟁을 해야만 했다. 전쟁은 무기와 군인이 필요하다. 독립 쟁취를 위한 1920년대의 상황은 처절했다. 그들은 빵 굽는 집이나 세탁소 또는 은밀한 장소에서 폭발장치를 제조했다. 시오니스트 유태인들은 독립운동에 필요한 무기를 스스로 개발하고 부족한 것은 외국으로부터 몰래 사오기 시작했다.

1933년에는 이스라엘 국가 재건 이전의 군대조직인 「하가나」 결성되어 무기제조는 좀더 체계화되었다. 독립전쟁 직전인 1947년, 시오니스트 지도자 벤구리온은 무기제조를 위한 설비를 구하기 위해 「하가나」의 엔지니어들을 미국으로 보냈다. 이스라엘 독립투사들은 기계들을 몰래 반입하여 경기관총과 대포를 제작할 수 있었다. 국가 재건 이후에 이 비밀 병기제조창들은 이스라엘 군수산업체로 탈바꿈했다.

이스라엘 군수산업체는 1954년 우지 경기관총을 개발하고, 이스라엘軍에 다양한 무기를 공급했다. 이 업체가 생산한 무기 중 널리 알려진 것이 갈릴 자동소총, 메르카바 탱크, 無人 원격조종 소형 비행기 등이다.

1953년에는 「이스라엘 항공산업체(IAI)」가 설립되어 항공기 개발의 발판을 구축했다. 이 업체는 설립 6년 만에 독자적으로 항공기 제조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곳에서 생산한 최초의 비행기가 「푸가 마지스터」이며, 그 후 수송기도 자체적으로 만들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항공산업은 1967년 「6일 전쟁」 이듬해, 이스라엘에 대한 프랑스의 무기 금수 조치를 계기로 크게 도약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이 군수물자 조달을 의존해 왔던 나라 중의 하나로, 이스라엘 공군의 요청에 따라 「미라지」 전투기를 납품해 왔다.

프랑스의 지원이 중단되자 IAI는 자체 공군기 제작에 착수하여 「미라지-5」의 개량형인 「네세르」 전투기를 생산하여 1971년부터 실전 배치하고, 1975년에는 「네세르」의 차세대 비행기인 「크피르」를 제작했다. 「크피르」는 계속 개량되어 현재까지도 이스라엘 공군기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미국 해병대에도 판매되고 있다.

이스라엘 防産品 수출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IAI는 군사첩보위성 오페크와 상업용 위성 아모스 발사를 성공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을 세계 8大 위성국가로 만들었다.

물 관리나 무기 개발은 이스라엘 유태인들이 생존을 위해 연구, 개발해 낸 기술의 결과이다. 새로운 기술과 무기는 주변 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 기여했다. 아인슈타인이 세운 테크니온 대학은 개교 70년을 넘기면서 세계적인 工大로 발돋움했다. 컴퓨터나 통신 분야에서는 미국 MIT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벼락부자의 꿈으로 기술개발

1989년 소련 체제 붕괴 후 세계 각국이 총성 없는 경제전쟁에 돌입했을 때 이스라엘은 외부의 敵으로부터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들을 民需로 돌려 상업화의 물꼬를 텄다. 수차례 전쟁을 거치면서 적국 동향을 살피던 기술들이 세계를 휩쓴 정보통신 산업에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이스라엘 유태인들의 창의적 두뇌가 가세했다. 이들은 정해진 길을 따라 가기를 거부하는 성향이 강할 정도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필자는 1990년대 중반경 KOTRA 조사부에서 이스라엘을 포함한 중동지역을 맡고 있었다. 하루는 駐韓 이스라엘 대사관의 상무관이 사무실로 찾아와 『한국 기업들이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너무나도 생소한 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1996년 10월 텔아비브 무역관으로 발령받고 와보니 우리 업계에서는 이스라엘의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정부와 언론계에서는 이스라엘의 기술개발 정책과 제도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끊임없이 오고 있었다. 대기업 중에는 이스라엘에 아예 R&D(연구개발)센터를 열겠다는 계획을 가져오기도 했고, 經協사절단 일원으로 방문했던 어떤 중소기업체 사장은 현지 벤처 업체를 찾아갔다가 즉석에서 수십만 달러의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이스라엘 정부와 공동 R&D 펀드를 조성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PCS 이동통신사업 시행을 앞두고 있던 1997년경에는 국내 여러 통신회사들이 직원 수십 명씩을 집단으로 이스라엘에 보내 호텔에 합숙하면서 수개월 동안 은밀하게 기술연수 사업을 시행했다. 한국 통신업계의 求愛에 이스라엘 통신기술 보유 업체들의 콧대는 높아졌다.

1997년 말 국내 외환위기로 한국과 이스라엘 간의 기술협력 사업은 대부분 중단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하이테크 붐을 타고 파죽지세로 번창해 나갔다. 하이테크 기업들의 자금조달처인 나스닥에 100개 회사 이상이 上場하는 성과를 보임으로써, 서방 투자가들은 이스라엘 기술에 투자하기 위해 돈다발을 싸들고 몰려들었다.

새로운 기술이 수억 달러에 거래되는 일들이 벌어지자 이스라엘 젊은 과학 두뇌들은 밤잠을 자지 않고 기술개발에 노력을 다했다. 어떤 기술개발자는 이스라엘 국내 TV와의 인터뷰에서 『요즘은 너무 바빠서 아내와 함께 아이 만들 시간조차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인터넷 대박 터뜨린 4명의 神童


1998년 여름 이스라엘은 4명의 젊은이들로 나라가 들끓었다.

『1년 반 만에 3억 달러를 벌었고, 인센티브로 1억 달러가 더 지불된다고?』

인터넷 혁명이 세계를 뒤덮고 있던 이 무렵,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은 「미라빌리스」라는 들어보지 못한 회사의 神童들이 일확천금을 했다는 데에 자극을 받았다.

주인공은 아릭과 세피, 그리고 두 명의 친구들이었다. 군대를 갓 마친 20代 초반인 이들은 인터넷狂이었다. 가장 연장자인 아릭은 고등학교 3학년 중퇴이고, 세피는 고등학교 2학년 중퇴였다. 다른 두 명은 전문대학교 졸업과 대학교 재학 중이었다.

1996년 여름, 이들은 인터넷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당시까지 개발된 기술과 서비스는 어떤 것이 있고, 개발되지 않은 미개척 분야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오갔다. 장시간의 토론 끝에 인터넷에서 전화를 걸고 받듯이, 누가 인터넷을 새로 접속했는지 그리고 누가 인터넷망에 들어와 있는지를 알려 주는 「Instant messaging」을 개발해 상업화하자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이들은 각자가 하고 있는 일들을 때려 치우고, 기술 개발에 들어갔다. 회사 이름과 개발할 기술의 이름까지 즉석에서 지었다. 「I Seek You(당신을 찾습니다)」란 문장의 발음을 세 글자로 줄여 「ICQ」를 제품명으로 정하고 회사 이름은 「미라빌리스」라 했다.

이들 가운데 기업경영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최연장자인 아릭은 사업가인 아버지에게 사업비 투자를 요청했다. 자신들의 사업은 비밀이니까 무슨 일인지는 묻지 말라는 조건을 붙였다. 아들과 아들 친구 세피의 재능을 믿고 있는 아릭의 아버지 요시 바르디는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아들에게 사업자금 75만 달러(약 9억원)을 투자했다.

요시 바르디는 아들과 그 친구들의 기술개발에 돈을 대고, 미라빌리스 사장으로서 마케팅과 관리업무를 맡았다. 결국 아버지가 창업주인 셈이다.

필자는 1998년 중반 이스라엘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던 바르디 父子의 성공담을 스크랩하여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성공과정에 있어서 특별히 관심을 끌었던 부분은 자녀교육열이 유달리 강한 유태인 아버지로서 아들이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학교 공부에 덜 오염되었기에 투자했다.

기회가 되면 그 당사자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 기회가 지난 연초에 찾아왔다. 요시 바르디에게 한번 만나자고 제의했더니 텔아비브 대학교 바로 옆에 있는 그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단독주택의 한쪽 응접실을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책상 뒤와 왼편 벽에 설치된 대형 서가에는 책들이 빽빽했다. 그의 본업은 학부 때 배운 엔지니어링을 경제학과 접목시켜 기업 경영관리를 수치화하는 컨설팅이었다.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시장 동향, 한국과 이스라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필자는 그와 아들의 사업 성공과 관련해 질문했다.

―대학교를 나오지 않은 고등학교 중퇴 아들에게 무엇을 믿고 75만 달러나 되는 돈을 선뜻 대줄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내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았다. 나는 내 아들보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의 친구 세피의 재능을 더 믿었다. 왜냐하면 내 아들 아릭은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만뒀지만, 세피는 더 일찍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만두었기 때문에 그만큼 학교 공부에 덜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아릭이 고등학교를 그만 다니겠다고 했을 때, 아버지로서 기분이 어떠했는가.

『처음엔 머리 속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우리 유태인들의 자녀교육열을 당신도 알지 않느냐. 대부분의 유태인 부모들은 아이들이 커서 변호사 아니면 의사가 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이들이 이렇게 성공할 줄 몰랐다. 아무런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이 아이들의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2억6000만 건 이상 다운로드되었다』

―아이들이 기술을 개발했을 때, 마이크로 소프트社가 거래 제의를 했다고 하던데, 왜 거절하고 「AOL(American on Line)」에 팔았는가.

『마이크로 소프트社는 기술을 사겠다는 것이 아니고 돈을 조금 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런 돈은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ICQ를 1996년에 개발했는데, 마이크로 소프트社는 1999년에야 겨우 개발했다. 당시 마이크로 소프트社뿐만 아니라 AT&T, 야후도 인수 제의를 해 왔었다. 그러나 AOL이 가장 이야기하기가 편했다. ICQ를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1년 반 만의 기술개발로 4억 달러나 벌었다. 그 후 이스라엘 정치인들로부터 정치자금 지원을 요청받은 적은 없었는가.

이 질문에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히면서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얼굴 위로 치켜올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노! 우리는 엄청난 금액을 소득세로 이미 정부에 바쳤다. 그런데 왜』

─소득세는 얼마 냈나.

『거의 50%에 가깝다』

미라빌리스가 AOL에 4억 달러에 팔렸을 때, 이스라엘 재무장관이 젊은 기술 영웅들을 찾아와 축하했다고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세금을 그만큼 거둬들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요시 바르디氏는 개인 투자가로서 인터넷 벤처기업 15개社에 투자를 해놓고 있고, 아마존 닷컴과 AOL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와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는 그의 사촌이 가을에 한국에 갈 것이라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와이즈만 연구소 총장이라면서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이스라엘의 빌 게이츠

이스라엘을 하이테크 강국으로 만든 대표적인 기업 중의 하나가 「ECI 텔레콤」이다. 이 회사는 1957년 군수물자 생산업체로 출발하여 1980년대 民需用 통신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1990년대 후반경 DCME(디지털 서키트 다중설비) 분야에서 세계 시장의 70~80%를 석권함으로써 「이스라엘 정보통신=ECI 텔레콤」이라는 등식을 연상시켰다.

이 회사의 설비가 AT&T, MCI, BT 등을 비롯한 세계 140개국 이상의 통신회사에 설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출액과 수익률이 거의 매년 20%를 넘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대표적 기술은 기존 아날로그 전화선을 디지털화하여 10명 내지 20명에게 동시 통화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당시 기업경영을 맡았던 CEO 데이비드 루브너와 아시아 시장 마케팅 책임자였던 아모스 탈모르가 2002년 가을 개인 사업가 자격으로 텔아비브 무역관을 찾아왔을 때, 급성장한 비결과 최근 경영위기에 봉착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 당시 우리는 아침에 출근하면, 어떻게 하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매출을 늘릴 것인가 하는 문제로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찾았다. 그러나 요즘은 마케팅보다는 株主들의 이익 챙기기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다』

「체크포인트」社는 인터넷 방화벽 설치회사다. 이 회사는 1993년 軍에서 제대한 길 세워드라는 젊은이가 설립했다. 미국 대기업 500개社를 비롯하여 全세계 25만개 사이트 이상에 방화벽이 설치되면서 이 회사는 세계적인 통신보안 회사로 발돋움했다. 「방화벽」은 인터넷 사용시 외부 바이러스나 해커가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설립 3년 만에 나스닥에 상장되었고, 2000년에는 주식 時價 총액이 300억 달러를 넘었다. 창업주인 길 세워드의 개인 재산도 10억 달러를 넘어 「이스라엘의 빌 게이츠」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길 세워드는 198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軍에 입대할 때 컴퓨터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그의 임무는 軍內 컴퓨터망을 서로 연결하여 특정인에게는 기밀자료의 접근을 허용하는 반면, 그 외 사람들에게는 접근이 불가능케 하는 일이었다. 이 일을 그는 4년 동안 했다. 軍 복무 중에 맡았던 보직이 제대 후 그를 사업가로 출세시킨 것이다.

「체크포인트」는 전화요금 부과 시스템 개발 업체인 「암독」, 전화회사를 위한 음성메일 시스템 개발 회사인 「컴버스」와 함께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3大 하이테크 기업이다.

  이스라엘 전국은 거대한 연구단지

이스라엘의 벤처기업은 비즈니스 중심지인 텔아비브 주변에 밀집해 있는 것이 아니고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산재되어 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도시나 마을을 차를 몰고 다닐 때마다 느낀 점은 이스라엘 전국이 하나의 거대한 연구단지라는 것이었다. 외딴 산꼭대기를 산업단지로 만들고, 그곳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있었다.

레바논 국경과 13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산악지대에는 금속 절삭공구 부문에서 세계 3대 기업에 속하는 「이스카르」의 지원을 받는 수십 개의 금속가공·전자·로봇시스템·보안시스템 업체들이 자리 잡고 있다.

하이파 항구도시에는 이스라엘의 MIT로 알려진 테크니온 工大가 있는데, 이 학교 주변에는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퀄컴, IBM 등의 연구센터가 즐비해 있다.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러한 벤처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창업 보육센터」를 비롯, 산업공단을 조성해 놓았다. 산업공단은 굴뚝이 있는 제조업체가 아니라 사무실 안에서 컴퓨터나 실험기자재를 들여놓고 연구개발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산업공단은 언덕 높은 곳에 위치해 있기도 하고, 농지 한가운데에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하이파에서 해변을 타고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케사리아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는 의료기기나 화학 부문에 대한 벤처기업들이 입주해 있다. 케사리아 아래의 중소도시 나타니아는 전통 산업과 하이테크가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나타니아는 북부 하이파 항구와 남쪽 산업중심지 텔아비브의 중간에 위치해 오래 전부터 산업이 발달되었다.

나타니아와 텔아비브 중간인 「헤르츨 리아 피투아크」와 「라나나」는 이스라엘의 실리콘 밸리라 불리는 하이테크 본산이다. 「헤르츨리아 피투아크」는 외국인이 많이 사는 주거지이고, 「라나나」는 미국계 유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두 도시의 거리는 약 2km인데, 이곳에 하이테크 기업과 투자사들이 밀집해 있다.

텔아비브는 사무실 임대료가 비싸기 때문에 신생 벤처기업보다는 기반을 닦은 중견 하이테크 기업들의 본사가 많다. 텔아비브 남쪽 르호봇이라는 小도시에는 세계 생물학 부문의 10위로 꼽히는 와이즈만 연구소가 있다. 연구소 주변에는 바이오와 화학 관련 벤처기업들이 밀집해 있다. 히브리 대학의 농과대학과 정부의 농업연구소인 볼카니 센터도 르호봇에 위치해 種苗(종묘)를 비롯한 각종 과학 영농 기술업체들이 많다.

남부 네게브 사막에는 최근 벤구리온 대학을 중심으로 바이오 부문의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벤구리온 대학의 사막연구소는 세계 각지에서 진행 중인 사막화 현상이 인류 사회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올 것으로 보고, 그때를 대비하여 물을 적게 먹고 사막에서 자생할 수 있는 식물 개발과 사막에서의 養魚 기술개발에 진전을 보이고 있다.

  플라스틱 폭발물 탐지기

적지 않은 기업들 중에서 기억에 남는 기술들이 있었다. 이스라엘人들이 이런 것도 다 개발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준 것들 몇 개를 소개해 본다.

1998년 6월 초순, 나타니아 창업 보육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열다섯 개의 벤처기업 중 「스니펙스」라는 업체의 기술 프로젝트가 눈길을 끌었다. 직원은 모두 네 명. 두 명의 러시아계 유태인 엔지니어와 한 명의 이스라엘 토박이 사업가 그리고 한 명의 행정요원이었다. 두 명의 기술자는 모스크바 대학 물리학 교수 출신으로서 한 명은 폭발물 처리에 있어서 특허 50여 개를, 다른 한 명은 특허 25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이 개발하고 있던 기기는 폭발물 탐지기였는데, 플라스틱으로 밀봉된 폭파장치도 이 검색대에서는 탐지가 가능했다. 당시 이 기술은 미국 연방항공국에서 성능 테스트를 의뢰한 상태였기 때문에 1999년부터 본격적인 상업화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인천 신공항 건설과 월드컵이라는 대형 행사를 앞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테러방지 검색기기가 필요할 것으로 보였다.

이 이야기를 하자 對外 영업을 맡고 있던 쉬무엘 고넨 박사는 『제품이 완성되면 인천공항에 검색대에 이 탐지기를 설치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반 후, 국내 근무를 마치고 다시 텔아비브 무역관에 발령 난 필자는 나타니아 창업 보육센터에 스니펙스 회사의 연락처를 문의했더니, 미국에서 이 회사를 통째로 매입해 인력까지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內 연락처는 미국 보안당국에서 비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보육센터에서도 모른다고 말했다.

1998년 6월 중순, 네게브 사막의 중심 도시 베르쉐바에 있는 포트레스社를 찾아갔다. 이 회사는 「스마트 카드」란 암호칩을 제조하여 모토로라와 톰슨에 공급하고 있었다. 벤구리온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는 그라노트 사장은 세계적으로 사용이 확대되고 있는 스마트 카드는 암호장치가 완벽하지 못하면 엄청난 손실이 있다면서 예를 하나 들었다.

『독일 「도이치 텔레콤」의 공중전화카드가 500만 마르크 가량 판매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입금액은 200만 마르크밖에 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마피아가 공중전화카드의 암호를 풀어서 인터넷으로 더 싼 가격에 팔고 있었다』

  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癌치료

002년 4월25일 텔아비브에서 北으로 차를 몰고 1시간 30분 가량 올라갔다. 산기슭에 위치한 요크네암이라는 조그만 도시의 도로변 언덕 위에 수십 개의 의료기기 제조 벤처기업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중 하나가 「미사일 기술을 이용하여 癌을 치료한다」는 갈릴 메디컬社다.

아미르 사장은 필자에게 공장 안을 안내해 주었다. 공장은 여러 개로 연결된 실험실이었다. 그는 한 실험실에서 여직원이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고 했다. 그녀는 가는 침에 연결된 호스 끝의 스위치를 눌렀다. 유리관 속의 진공상태에 위치해 있던 침 끝에 동그랗게 얼음이 얼었다. 일정한 크기가 되었을 때 스위치를 끄고 다른 스위치를 올렸다. 이제는 그 얼음이 녹았다.

이는 침을 이용하여 인체 내부의 질환을 치료하는 소위 냉동치료법이었다. 암세포 부위에 침을 꽂아 아르곤 가스를 주입시켜 그 부위의 온도를 영하 40도로 낮추면 암세포가 죽는다는 것이다. 특히 수술이 어려운 전립선암이나 신장암을 치료할 때 이러한 냉동치료법이 필요하다면서 갈릴 메디컬社는 경쟁사들보다 침의 굵기가 훨씬 가늘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자랑했다. 침이 굵으면 그만큼 암세포가 아닌 부위까지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향후 20년 뒤에는 현재와 같은 외과수술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초음파 수술 또는 침과 같은 미세한 도구로 칼을 몸에 대지 않는 치료법이 보편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사일 기술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미르 사장은 『미사일을 발사할 때 발사대가 엄청난 열을 받게 되는데, 전투 중에는 再발사를 위해 얼마나 신속하게 냉각시키느냐가 관건』이라면서 이러한 급속냉각 기술이 냉동치료법에 응용되었다고 했다.

  중동 사막에서 김 양식 실험

2002년 2월경, 필자는 이스라엘 해양연구소에서 바닷물을 끌어다가 청정 김을 양식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김을 먹지도 않는 나라에서 김을 재배한다는 것은 너무나 뜻밖의 소리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연근해의 수질오염 때문에 심해로 김 양식이 옮겨 가고 있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바닷가에서 청정 김을 재배하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몇 년 전 러시아系 유태인 과학자가 연구실에서 인삼 뿌리를 세포 증식시켜 배양한 지 6週 만에 똑같은 성분의 인삼가루를 만들어 낸다면서 한국에서 인삼 첨가제를 사용하는 건강식품 제조업체들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받았던 충격과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이스라엘 해양연구소에서 벤처기업가와 공동으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2002년 3월14일 하이파 입구에 있는 연구소에서 벤처사업가 에란 코헨氏와 이스라엘 해양생물학자 미하엘 프리드랜드 박사를 만났다. 그들은 1997년 일본 김 생산의 40%를 차지하고 있던 아리아케海의 간척사업 이후 현지 김 생산이 전년보다 25%가 감소하면서 가격이 60%나 폭등하는 것을 보고, 내륙에서의 김 양식법 개발을 위한 벤처기업을 설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닷물을 끌어와 만든 대형 水槽(수조)에서 김 양식을 책임맡은 프리드랜드 박사는 일본인들과 대만인들이 즐겨 먹는 김을 목표로 이미 세 번째 수확을 한 상태였다. 한국인들이 먹는 김은 아직 실험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는 경남 통영市 일대의 김 양식에 대한 정보와 부산 부경대학교 모교수의 김 양식에 대한 논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수질오염으로 연근해 김 양식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는 추세를 읽었다. 그래서 바닷물을 대형 수조로 끌어올려 수관에 필터장치를 설치하여 오염물질을 걸러내고 물을 깨끗하게 만든 후 청정수에서 김을 양식한다는 것이다. 해양연구소 바깥에 있는 실험 양식 수조는 수질 청정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10분의 1의 물을 바다로 내보내고 그 양만큼 계속 새로운 바닷물을 보충하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연간 20주일 동안 김 양식이 가능하다고 할 때, 수조에서는 m2당 2kg의 마른 김을 생산해 낼 수 있다면서 고급 김의 판매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했다. 면적당 연간 생산량과 시장 판매가격을 미리 수치화시켜 타산이 맞는 개발인지를 알아보고 있었다.

1990년대 과학기술 육성을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실시한 성공적인 조치는 「기술 인큐베이터 프로그램」 도입과 「요즈마 펀드」 조성이다. 기술 인큐베이터는 상업화할 수 있는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심사하여 승인이 나면 2년간 보육센터에서 설비와 연구 개발자금을 지원해 주는 제도였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 후반 IT 벤처기업 육성기 때 이스라엘의 기술 인큐베이터를 다양한 채널로 벤치마킹했다. 이스라엘이 이 프로그램을 가동한 목적은 1989년부터 몰려든 舊소련권 유태인 귀환자 중 고급 과학두뇌들을 새로운 기술개발에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1990년부터 시행한 기술 인큐베이터의 첫 참가자들이 보육센터를 졸업할 시점인 1992년에는 정부가 1억 달러의 기금을 배정하여 「요즈마」라는 투자펀드를 조성했다. 이 펀드는 기술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의 투자회사를 끌어들여 합작투자 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성공적인 운영으로 여러 개의 벤처투자기금을 설립하는 데에 성공한 요즈마는 1997년에 민영화되었다.

  新기술의 진원지는 대학과 연구소

대학교와 연구소는 新기술의 진원지다. 이스라엘은 1948년에 독립되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히브리 대학교, 테크니온 工大, 와이즈만연구소가 설립되어 있었다. 이들 대학과 연구소에서 배출한 인력은 독립 이후 국내 과학과 기술을 주도했다.

이스라엘 대학은 오래 전부터 교직원들이 새 기술을 개발하면 그것을 특허출원하여 외부 민간 투자가들에게 소개시켜 사업화해 왔다. 수익금의 일정 비율은 기술 개발자의 몫이다. 교수들에게는 新기술 개발에 대한 동기를 부여했고, 대학은 이러한 기술 로열티 수입으로 재정 확보에 보탬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하이테크 붐을 타고 각 대학들의 新기술 마케팅조직은 더욱 강화되었고, 업계나 투자가와의 합작사업을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대학별로 산업공단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스라엘 학계가 국가 기술개발에 기여한 또 다른 측면은 벤처기업의 경영과 마케팅 인력을 양성해 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벤처기업들은 新기술 개발에 정신을 쏟다 보니 정작 마케팅 인력이 없었다. 1990년대 중반경, 현지 신문 보도에 따르면, 15명 규모의 벤처기업의 경우, 사장·여비서·행정요원 한 명에 엔지니어가 12명이라는 것이다. 이 경우 누가 해외 마케팅을 하느냐고 야단이었다. 마케팅 전문가를 채용하려 해도 인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텔아비브 대학이 세계 MBA 순위 1위로 평가받고 있는 「켈로그 비즈니스 스쿨」을 유치함으로써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1996년부터 매년 100여 명의 하이테크 기업 종사자 위주로 선발해 켈로그 교수진과 텔아비브 대학 자체 교수진이 국제 마케팅을 비롯한 기업 경영교육을 시키고 있다.

벤처업계 전문가들에 의하면 新기술을 개발해 놓고도 마케팅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업은 실패하게 된다고 한다. 하이테크 벤처 기업의 사업 성공에 있어서 새로운 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마케팅 요원 양성은 기술개발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기술 강대국과 軍의 역할

이스라엘이 기술 강대국으로 부상하는데 軍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독립 이후 수차례의 전쟁과 끊임없는 긴장상태에서 생존을 위한 기술개발은 불가피했으며, 이 기술들이 1990년 美蘇 양극체제가 무너지면서 商用化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방위산업체들은 보유하고 있는 무기 제조기술을 民需用으로 전환하여 돈벌이로 나섰다.

이스라엘에는 電子 정보부대로 「쉬모네 마타임」이 있다. 쉬모네 마타임은 히브리語로 숫자 「8-200」을 일컫는다. 美國의 국가안보국(NSA)에 해당하는 이스라엘軍의 중앙 정보부대다. 이 부대는 1959년 이스라엘 정보부대 산하 연구·기술 담당 電子부대로 출발했다. 이 부대는 이스라엘의 하이테크 산업을 주도하는 인력양성소로 자리매김되었다.

조직에 대해서는 국가기밀로 분류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이스라엘 하이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외국 투자가나 기술 사업자들 사이에 이 부대가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나면 남자는 3년간, 여자는 2년 동안 軍복무를 하고, 제대 후 대학에 입학한다. 「쉬모네 마타임」 복무자들은 軍복무 기간 중, 軍이 지정하는 대학교의 지정학과에서 4년 동안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대학에서 보안·암호·이미지 전송 데이터 처리 등과 같은 내용을 공부했다면, 軍에서도 동일한 분야에서 4년 동안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응용을 하게 된다. 총 8년간 이론과 실기를 터득하는 셈이다. 이 기간 중 자신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경우, 본인 명의로 특허를 출연토록 하여 軍 복무 이후 이를 토대로 비즈니스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쉬모네 마타임」은 이스라엘의 고등학교 3학년생들이 열망하는 부대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軍 당국은 전국 고등학교 3학년생들의 성적표를 분석하여 수학이나 컴퓨터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인 학생들에게 「쉬모네 마타임」 입대 제의서를 발송하여 해당 학생들이 수락하면 선발한다.

「쉬모네 마타임」 부대를 제대하면 26세쯤 되는데, 제대 후 창업하여 30代 초반에 세계적인 기업으로 번창시킨 주인공들이 방화벽의 체크포인트社, 보이스 메일의 컴버스社, 데이터 保安(보안)의 나이스와 오디오 코드, 생물정보학의 컴퓨진 등이다. 이 부대 출신 벤처기업가를 모두 합치면 30~40명에 달한다. 이 중 나스닥 상장사만도 10여 개가 된다고 한다.

이스라엘 벤처기업들은 1990년대 후반 세계적인 정보통신 붐을 타고 미국 증권시장으로 진출했다. 나스닥 상장사만 해도 100개社가 넘었다. IT(정보기술)경기가 최고에 달한 2000년대 상반기에 체크포인트, 컴버스, 머큐리, 암독 등과 같은 이스라엘 간판 벤처기업들의 나스닥 株價는 120달러에 달했다.

  하이테크 거품 붕괴 이후의 위기

당시 텔아비브 업계는 수년 내에 세계 경제를 制覇(제패)할 것 같은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들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찾아드는 외국의 투자가들에게 『우리의 목표는 聖地로 알려져 있는 이스라엘 국가 이미지를, 기술을 토대로 한 비즈니스 국가로 바꾸는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2000년 후반부터 하이테크 거품이 빠지면서 이스라엘人들의 원대한 포부는 불안과 좌절로 바뀌어 갔다. 벤처기업 창업자들과 벤처 캐피털리스트들은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나스닥 株價 동향을 살펴보게 되었다. 株價는 끝없이 곤두박질치고 판매시장은 차츰차츰 막혀 가고 있었다. 세계적인 판매망을 갖추고 대대적으로 투자한 기업일수록 영업 손실이 더 심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 가을에 터진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로 인해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팔레스타인人들의 자폭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이 악순환되자 국내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치안이 불안하니 외국인이 들어오려 하지 않고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들도 자금을 싸들고 되돌아가는 형편이었다.

2003년 초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공격설이 나돌자 이라크의 對이스라엘 선제 미사일 공격 가능성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외국인들이 이스라엘을 떠났다. 이스라엘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해왔던 정보통신 분야가 무너지고, 테러와 전쟁 분위기로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고, 內需까지 얼어붙자 이스라엘人들은 앞날에 대한 걱정이 대단했다.

인터넷 관련 닷컴회사들이 가장 치명타를 입었고, 핵심 기술을 이용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확실한 기업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제품화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회사들은 추가적인 자금조달의 길이 막혀 쓰러져 갔다.

정보통신 경기의 절정기로부터 약 4년이 되어 가는 이 시점에 이스라엘 IT업계는 체크포인트, 암독, 베리시티(ECI 子회사), 머큐리, 조란, 알라딘, 오디오코드, 엠 시스템즈, 메타링크 브로드밴드, 세라곤 네트워크 등이 주도하고 있다. 이들 중 몇 개 기업을 제외하면 年 매출액이 1억~2억 달러 수준의 중소기업들인데, 이들은 기술력에 자신감을 갖고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정보통신 업계가 이런 상황에 이르다 보니 80여 개의 벤처 펀드들이 죽을 지경이다. 최근 들어 투자금을 우려하는 벤처 업계의 목소리가 언론에 수시로 보도되고 있다. 이미 투자한 사람들은 투자 기간 종료時 재투자를 포기하고 원금을 되찾아가는 분위기며, 펀드에 투자할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IT에서 BT로

많은 사람들은 2005년을 걱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이테크 경기 절정기인 2000년 상반기에 투자한 사람들이 5년 투자기간이 종료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벤처기업 투자금 확보가 시급한 과제다. 그 절박한 사정은 2003년 말 예루살렘에서 개최된 親이스라엘 미국인 유태인 조직(UJA)의 총회에서 이스라엘 측 대표 엘리 후르비츠가 미국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유태인들과의 일체감을 표시하려면 자금투자로써 확실한 행동을 보여 달라고 호소하는 데서 역력하게 나타났다.

과거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현지 IT 전문가 한 사람은 연초 테크니온 工大 컴퓨터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행한 연설에서, 경기 호황기 때 이스라엘이 인도로부터 低賃의 프로그래머들을 수입해 왔더라면 현재와 같은 어려움은 덜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경기 호황기에 외국인 프로그래머들의 수입을 금지했기 때문에 인력 수급이 맞지 않아서 내국인 IT 인력의 몸값이 너무 높아졌고, 결국은 기업의 비용을 상승시켜 회사를 통째로 무너뜨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IT 부문의 거품이 사라진 후 이스라엘은 바이오테크(BT·생명공학)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IT가 테크니온 工大에서 나왔다면, BT는 와이즈만연구소에서 나온다. 바이오 부문에서 이스라엘이 경쟁력을 갖추고 연구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분야는 암, 뇌중추신경, 알츠하이머, 파킨슨씨 병 치료 등이다.

이스라엘이 자체 개발한 뇌중추신경 계통 약품이 세계시장에 판매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알츠하이머와 파킨슨씨 병에 대한 치료 기술이 급진전되고 있는 상황이다. BT 부문에 대한 투자금은 과거와 달리 훨씬 많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필자는 1996년 10월1일부터 텔아비브 무역관에서 3년간 근무하고 귀국했다가 2002년 1월1일부터 다시 텔아비브 무역관에서 근무 중이다. 두 번째 근무하러 현지에 도착했을 때 몇 가지가 과거와 달라졌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텔아비브에 고층 빌딩들이 제법 많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는 외형적인 발견이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 기업인들이 과거에는 외국 돈을 이스라엘로 끌어들이는 데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데, 이번에는 한국 기업에도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다는 입장 변화였다. 그만큼 현지 기업에 대한 투자 여건이 좋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 번째는 한국 기업이 이스라엘 벤처기업에 투자한 실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경제학의 핵심원리는 인센티브

그동안 이스라엘에서 기술개발 현장을 쫓아다니면서 발견한 사실은 유태인들이 창의력과 기업가 정신이 강하고 기술개발에 관한 한 철저한 인센티브를 준다는 것이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이 어떤 의견을 말하면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보다는 「왜 그러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많은 이 사람들이 때로는 짜증스럽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바로 창의력의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낯선 사람을 만나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진행되면 부담 없이 함께 사업하자고 제의하는 이스라엘人들은 기업가 정신이 강하다. 비즈니스에 대한 사고와 행동은 타고난 사람들로 보인다. 기술개발이나 사업에 있어서는 철저한 인센티브를 바탕으로 시작된다. 개인에 대한 직접적인 인센티브만이 창의력과 新기술 개발 성공의 관건이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학의 핵심 원리가 인센티브라고 한다.

요즘 우리 업계에서 이스라엘 기술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이스라엘 기업들도 한국의 파트너를 찾고 있다. 한국의 생산능력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기술이 합쳐져 상호 「윈윈(Win-Win)」 전략의 합작사업이 더 많이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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