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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자연·지지(地誌)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의 정치
이스라엘의 외교
이스라엘의 군사
이스라엘의 산업·경제
이스라엘의 사회·문화
이스라엘과 한국과의 관계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이스라엘국(Medinat Yisra'el). 면적 2만 770㎢. 인구 617만 6533명(2003). 북쪽은 레바논, 동쪽은 시리아·요르단·파레스타인, 남서쪽은 이집트·팔레스타인과 접해 있다. 수도는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자연·지지(地誌)

팔레스타인(이스라엘)의 지형은 북쪽 레바논에서 남쪽 네게브사막에까지 이어지는 중앙구릉지대, 요르단강 서안의 평야, 구릉지대와 지중해 사이에 낀 해안평야, 남부의 네게브사막 4부분으로 구분된다.

① 중앙구릉지대 북부의 갈릴리지방은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하며 토양이 비옥하여 올리브와 담배의 생산으로 유명하다. 아랍계 주민들이 이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나사렛이 중심도시이다. 요르단강 유역에서 북서쪽으로 흘러 지중해연안의 하이파 북방에 이르는 에메크협곡이 이 중앙구릉지대를 남북으로 분단한다. 이 지방은 고온다습하여 말라리아의 위험이 있는 습지대였으나 지금은 곡창지대로 바뀌었다. 에메크협곡 남부의 구릉지대는 고대유대와 이스라엘왕국의 중심지였으며 주요 도시는 예루살렘·람라 등이다.

② 요르단강 서안은 평야지대이다. 시리아와 레바논국경의 헤르몬산에서 발원하는 요르단강은 이스라엘 영내를 117㎞ 흐른 뒤 요르단 영내를 139㎞ 가로질러서 사해(死海)로 유입되기 때문에 수리권을 둘러싸고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이 대립하고 있다. 이 평야의 북부는 농업지대이며, 이스라엘의 주요 수원인 갈릴리호수가 있는데, 수면이 해면보다 약 212m 낮다. 남부로 가면 땅은 거의 불모지이고 남단에는 수면이 해면보다 392m 낮은 염호인 사해가 있다. 사해에서는 소금·칼륨·브롬 등을 채취한다. 이 지역과 중앙구릉지대의 남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로서,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군이 점령했다. 이스라엘정부는 이 지방을 유대사마리아라고 한다.

③ 지중해 연안의 평야부는 이스라엘의 심장부이다. 중요 항구인 하이파, 최대도시 텔아비브를 포함하며, 전국의 인구 60% 이상이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공업지역이며 동시에 과수재배의 중심지이다.

④ 남부는 국토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네게브사막이다. 연강수량은 북단에서 200㎜, 남단에 일라트에서는 25㎜이다. 이스라엘정부는 북부에서 물을 끌어들여 네게브사막을 개발하고 있다. 중심도시는 베에르셰바·디모나이며 디모나 교외에는 원자로를 포함한 핵관련시설이 있다. 항만도시 에일라트는 아카바만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로서 군사적·경제적·심리적 요지인데, 이란혁명 이전에는 이곳을 통해 이란원유를 수입했다. 그리고 파이프라인으로 하이파항에 보낸 다음 루마니아 등 동유럽 여러 나라로 재수출했다. 이집트의 아카바만 봉쇄령은 제3차 중동전쟁의 직접적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

유대인의 조상 이스라엘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것은 BC 20세기 무렵이다. BC 11세기에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했으나, BC 10세기 전반에 이스라엘왕국과 유대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 두 나라가 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각각 멸망된 뒤 BC 1세기에는 로마제국의 보호하에 유대왕국이 다시 수립되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에 저항했기 때문에 탄압받고 AD 70년 유대인의 세계유랑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럽의 유대인은 끊임없는 박해를 받았다. 19세기 후반에는 기독교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동화를 용인하지도 않았던 유대인들 사이에서 나라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은 19세기 유럽에서의 각 민족이 고유한 국가를 희구한 민족주의이다. 유대인이 건국을 희망한 땅은 당시 오스만제국의 땅이었던 팔레스타인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산은 그들 국가건설의 상징이었으므로 시온산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하고, 그 추진자를 <시오니스트>라고 했다.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시오니즘의 지지층은 확대되었고, 주로 동유럽에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무인지대가 아니고, 팔레스타인인(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등 아랍인)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그들의 반발을 받았다. 제1차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전후 아랍국가의 독립을 약속했다. 그리고 아랍측은 이 국가 가운데 팔레스타인도 포함시켜 수락하였다. 한편 영국은 시오니스트들에게 전쟁협력을 요구하고, 1917년 밸푸어선언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 수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영국은 위임통치령의 형태로 팔레스타인을 직접 지배했다. 1930년대 나치스가 유럽에서 세력을 확대하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이 증가했다. 특히 독일계 유대인은 자본과 기술을 팔레스타인에 가지고 왔기 때문에 유대인사회가 크게 성장했다. 이와 동시에 팔레스타인인의 반발 또한 고조되었고 쌍방의 알력은 무력충돌로 발전했다. 제2차세계대전중 나치스의 유대인대학살은 시오니스트들로 하여금 그들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또한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동정이 고조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팔레스타인에서는 무력충돌이 격해졌고, 영국에 대한 테러가 빈발했다. 이에 영국은 팔레스타인문제를 국제연합(UN)에 맡겼으며, 국제연합총회는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와 유대지구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시오니스트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1948년 유대국가 이스라엘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아랍측은 분할안을 거부하고 주변의 아랍 여러 국가가 팔레스타인으로 진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1948∼1949년)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아랍 각국 군을 격파하고 분할안에 정해진 것 이상의 땅을 확보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지배지역에서 쫓겨났다. 반대로 아랍 여러 나라에서는 반유대감정이 격화하였고 많은 유대인이 이주를 강요당했다. 이스라엘정부는 모든 유대인에게 이스라엘 이민권과 시민권을 획득할 권리를 부여하는 <귀환법>을 제정하고 아랍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유대인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는 급증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시오니스트의 국가가 성립, 발전했다. 한편 아랍세계는 팔레스타인인의 권리회복을 요구하여 1956년 제2차 중동전쟁,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특히 1967년의 전쟁에서는 이스라엘이 압승하였다. 시리아에서는 골란고원을, 요르단에서는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이집트로부터는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빼앗았다. 그러나 1973년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이집트의 기습을 받고 큰 손해를 입었다. 또한 아랍산유국들온 미국의 이스라엘 긴급군사원조에 반발하여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수출을 금지시키고, 비우호국에 대한 수출량을 삭감하는 일련의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아랍원유에 의존도가 높았던 서방측 공업국들을 놀라게 했으나, 이스라엘이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랍측이 첫번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군의 연승 신화를 깼으며, 석유수출금지로 국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투가 수습되자 미국 닉슨행정부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스텝 바이 스텝> 방식의 평화에 대한 노력을 시도했다. 그리고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서 아랍병력과 이스라엘 병력을 격리시키기 위한 <왕복외교>를 폈다. 키신저 외교의 뒤를 이은 것이 1977년 등장한 카터행정부의 포괄적인 평화안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베긴내각이 강경책을 썼기 때문에 교섭은 난항을 거듭했다. 이 평화외교가 정체상태에 있는 가운데 1977년 이집트의 사다트대통령이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새로운 국면을 열었고, 이어 1978년 9월에는 이스라엘·이집트·미국의 3국수뇌회담이 합의에 도달했다. 이것이 캠프데이비드 협정으로서 2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이스라엘·이집트 사이의 평화조약, 대사 교환, 시나이반도 반환 등이다. 다른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자치를 위한 교섭 규정이다. 이 합의로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아랍국가와의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1981년 사다트대통령이 암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1982년 4월 시나이반도를 반환했다.

  이스라엘의 정치

정체(政體)는 민주공화제이며 성문헌법은 없다. 귀환법·국적법·대통령법·재판관법·선거법 등 12종의 기본법이 헌법적 역할을 하고 있다. 크네세트라고 하는 정원 120명의 의회가 최고통치기관이다. 의원은 18세 이상의 선거권자에 의해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개인이 아니라 정당에 대해서 투표하게 되며,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을 분배하는 완전비례대표제이다. 이 제도하에서는 사표(死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정당이 난립하고 있다. 단독으로 크네세트의 과반수를 누린 정당은 없고 항상 연립내각이 정권을 담당한다.

1949년 제1차크네세트에서 1977년까지는 노동당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가 조직되었고 그 이후에는 베긴수상이 이끄는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내각이 조직되었다. 1988년 11월 총선에서는 리쿠드당과 노동당이 모두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Y. 샤미르를 총리, S. 페레스를 부총리에 기용했다. 샤미르총리는 1989년 팔레스타인인에게 제한적 자치권을 부여하는 한편 이스라엘점령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이 자체선거를 실시하는 샤미르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같은해 3월 연립내각은 붕괴되었다.

이후 6월 리쿠드당을 중심으로 초강경 극우 정권이 탄생했다. 한편 1989년부터 구소련으로부터 유대인의 이민이 급증, 1990~1993년까지 약 45만 명이 들어왔다. 1991년 10월 마드리드중동평화회의에 참석하였다. 요르단강 서안 등의 점령지에 이주를 추진하던 중 1992년 총선거에서 승리한 노동당정권이 이를 재고하기로 하였다. 1993년 9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점령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에서 팔레스타인잠정자치를 실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10월 I. 라빈 총리, 페레스 외무부장관, PLO의장 Y. 아라파트가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95년 11월 라빈 총리가 유대인 과격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1996년 5월 우파인 리푸드당의 B. 네타냐후 당수가 총리에 선출되었다. 8월 이주지 확대를 승인, 그 뒤 팔레스타인 주민과 이스라엘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여 1997년 헤브론 철수에 합의하였다.

교착상태에 있던 중동평화회담은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1998년 10월 백악관에서 네타냐후와 아라파트가 영토-평화교환협정에 조인하게 되었다. 평화협정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 서안 13.1%에서 추가철군하며, 팔레스타인정치범 수백명을 단계적으로 석방하는 한편 팔레스타인은 미국 중앙정보국(CIA) 지원 아래 요르단강 서안에서 테러대책을 강화하고 PLO창설헌장의 이스라엘 적대조항폐지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03년 1월 조기총선에서 샤론의 리쿠드당이 압승했으며 2월에 샤론 총리를 중심으로 리쿠드당 38석, 극우파인 국민종교당 6석, 중도파인 시누이당 15석의 새로운 연정이 탄생했다. 그 뒤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은 샤론 총리의 강경정책으로 표류를 거듭하다가 그 해 5월 미국·러시아·유럽연합·유엔이 공동으로 유혈사태 종식을 위한 중동평화 로드맵을 발표했다. 이 로드맵은 2005년까지 3단계로 나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측이 단계적으로 2차례의 정상회담을 거쳐 2003년 5월 이·팔 당국이 모두 수용했다. 그 뒤 6월에는 미국의 G.W. 부시 대통령과 이·팔 지도자간 정상회담이 열려 폭력종식과 팔레스타인 독립국 추진에 합의했다. 6월에는 팔레스타인의 3대 무장단체가 한시적 휴전을 선언했으나 이스라엘의 보안장벽 건설 강행과 팔레스타인의 자살공격이 이어지면서 로드맵은 좌초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이 로드맵은 중동분댕의 주요 중재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어서 앞으로 협상의 근간이 될 전망이다.

  이스라엘의 외교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사는 미국은 최대 동맹국으로 전통적으로 대미의존정책을 추구해왔다. 이스라엘이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중동국가는 이집트·요르단·모로코지만 중동평화협상의 진전에 따라 대아랍권 외교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팔레스타인과는 오슬로협정 이후 평화과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정착촌건설 강행과 요르단강 서안 군대철수문제를 둘러싸고 양측간 폭탄테러와 보복시위가 번갈아 전개되면서 갈등을 빚었으나 1998년 10월 23일 역사적인 <영토·평화교환협정>에 조인했다. 1967년 3차중동전 때 단교한 러시아와는 1991년 10월 복교했다. 1992년 중국·인도, 1993년 베트남과 각각 수교했다. 바티칸과는 가톨릭-유대교 두 종교간의 오랜 반목으로 미수교상태로 있다가 1994년 6월 수교에 합의했다.

2003년 6월 G.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스라엘 총리, 팔레스타인 수반과의 3자회담에서 폭력종식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추진 등에 합의하고 중동평화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해 9월에 이스라엘 내각은 잇따라 발생한 대이스라엘 폭탄테러에 대응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축출키로 결정함에 따라 로드맵은 좌초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스라엘의 군사

이스라엘은 아랍 여러 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약 2만 명의 직업군인과 병역기간 중의 병사, 그리고 예비역 등으로 편성된다. 국민개병제로 18세가 되면 남자는 3년, 여자는 1년 9개월의 병역의무를 진다. 병역기간이 끝나면 예비역에 편입되고 남자는 54세까지, 여자는 24세까지 해마다 1개월씩 훈련을 받는다. 정규군은 16만 1500명(2002)이다. 그러나 예비역을 소집하면 짧은 기간 안에 43만을 동원할 수 있다. 100여기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8년 5월말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탄두운반수단으로는 예리코Ⅰ, Ⅱ와 랜스 지대지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육군은 12만 명으로 3개 기갑사단, 4개 기계화보병여단, 3개 포병대대로 구성되며 3895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 해군은 6500명, 3척의 잠수함, 55척의 초계·연안전투함을 보유하며, 공군은 3만 5000명, 전투기 478대, AH-64아파치를 포함한 무장헬기 93대를 보유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장비·훈련·사기·실전경험 등에서 중동 최강의 실력을 갖추었으며, 정보기관 모사드는 아랍 여러 나라를 비롯한 세계 각처에서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산업·경제

시오니스트들은 고도의 기술을 활용하여 팔레스타인의 농업을 발전시켰다. 감귤류 등의 수출은 연간 3억 달러를 초과하며 그 가운데 약 75%가 유럽으로 수출되는데, 최대의 시장은 영국이다. 1950년 외자도입촉진법을 제정한 뒤에는 미국계 기업을 비롯한 외국기업이 진출했다. 시멘트·광학유리 등의 산업이 발달했으며, 다이아몬드 연마산업의 규모는 이 부분에서 전통을 자랑하는 네덜란드·벨기에를 능가한다. 무기의 국산화를 추진하여 성공한 메르카바전차·가브리엘미사일·전투기 등이 유명하며 병기개발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수출을 장려한다. 노동자는 30만에 달하며, 수출 291억 8200만 달러, 수입 351억 6800만 달러(2002)이다. 농업과 공업 이외의 재원으로는 관광수입, 해외 유대인으로부터의 송금, 미국의 원조가 있다. 미국은 1975~1980년에 130억 달러를 원조했고, 연간 30억 달러(1994년 군사 18억 달러, 경제 12억 달러)를 무상으로 원조한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연간 1만 9500달러(2002)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경제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그 하나가 이스라엘의 지역적 고립 때문이다. 즉 수출입상대국을 먼 곳에서 구하는 무역형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아랍 여러 나라가 이스라엘과 거래하는 회사와는 관계를 단절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의 거래를 주저하는 기업들도 많다. 그러나 이스라엘경제에 가장 큰 부담을 주는 것은 연간 90억 달러(2001)에 이르는 군사비 지출이다. 이 군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국민들은 세계 최고의 세금을 부담한다. 또한 미국 원조의 대부분은 무기 원조이다.

  이스라엘의 사회·문화

건국 당시에는 유럽계 유대인 아슈케나짐이 다수였으나, 뒤에 중동의 유대인 세파르딤이 들어와 지금은 양쪽 모두 수적으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스라엘 상류계층의 대부분이 아슈케나짐이기 때문에 세파르딤 사이에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이스라엘 총인구 가운데 약 81.6%가 유대인이고, 나머지는 아랍인이다. 그러나 아랍인의 인구증가율은 유대인의 3배에 가까우며, 해마다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빠져 나간다. 이와 같은 인구구성의 변화는 유대인 국가인 이스라엘의 성격을 위협하고 있다. 공용어는 헤브라이어와 아랍어이다. 5∼16세까지는 의무교육기간이며,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학과 하이파의 공과대학 등 7개 대학이 있다. 종교는 유대교가 주류를 이루며, 아랍인들 사이에는 이슬람교·그리스도교·드루즈교 등이 있다. 지중해연안 하이파에는 바하이교단 본부가 있다.

  이스라엘과 한국과의 관계

1962년 4월 수교에 합의하고 1964년 8월 이스라엘의 주한 상주대사관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1978년 4월부터 대사관이 폐쇄되어 주일 이스라엘대사가 겸임하다가 1992년 1월 주한이스라엘 대사관이 다시 개설되었다. 한국은 1993년 12월 주이스라엘 한국대사관을 개설했다.

2002년 대한수입액 5억 123만 달러, 대한수출액 3억 2207만 달러이다. 2003년 교민수 28명, 체류자수 556명이다. 한국 단독수교국으로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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